평화주의자 헤스티아

신전도 신상도 없는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
성스런 불을 옮기는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


'헤스티아(Hestia)'는 로마에서는 '베스타(Vesta)'라고 불렀고, 영어로는 '베스터(Vesta)'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스티아는 가정과 공공기관의 화로(火爐)를 담당하는 여신이었다. ‘헤스티아’는 어원적으로도 ‘화로’를 의미한다. ‘베스타’라는 이름을 지닌 전기 매트나 벽난로 제품도 있다.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의 겨울점퍼 이름 중에도 ‘헤스티아’가 있다. 한때 ‘베스타’라는 이름의 봉고차가 인기를 끈 적도 있었다. 모두 따뜻한 화로를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일 것이다.

 

성냥이나 라이터가 없던 고대에 화로의 불은 항상 살아있어야 했다. 난방을 위해서나,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서나, 고기를 태워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나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기 때문이다. 실수 혹은 고의로 집안이나 공공의 화롯불을 꺼트렸다는 것은 가족을 돌보는 일과 공공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의미했고, 신에게 불경죄를 저지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가 한때 연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했던 것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은 화로의 불이 꺼지는 일이 없도록 소중하게 돌보았다. 어쩔 수 없이 화로의 불을 끌 때나 다시 피울 때도 경건하게 의식을 갖추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집안의 중요한 일은 모두 화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곳은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가정에 입회하는 의식을 치르는 곳이자, 쫓기는 자들이 피난처를 구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그것에 대고 맹세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화로는 항상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의 한 가운데에 위치했다. 크레타나 미케네 궁전의 중앙홀인 메가론(Megaron)이라는 곳에도 한 가운데에 커다란 화로가 놓여있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청인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에도 헤스티아의 화로가 있어 불이 꺼지지 않고 언제나 타오르고 있었다. 만약 해외에 식민도시가 건설되면 이 화로에서 불씨를 갖고 가 그 도시의 시청에 헤스티아의 화로를 세우고 불을 피웠다.

 

가정과 관청 행사의 구심점, 화로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 흉상


고대 그리스에서는 집안행사뿐 아니라 공적인 행사에서도 헤스티아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분신인 화로의 제단에 제일 먼저 제물을 바쳤다. AD 2세기경 그리스 여행 작가였던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제우스 신앙이 강했던 올림피아에서조차도 제우스에 앞서 헤스티아에게 제물을 바쳤다고 말한다. 엄밀히 말해 헤스티아에게는 처음뿐 아니라 마지막에도 제물이 바쳐졌다고 한다. 그녀는 크로노스의 장녀이자 막내였다. 형제자매들 중 맨 처음에 태어나지만 아버지 크로노스에게 집어삼켜진 뒤 맨 마지막으로 게워졌기 때문이다.

 

철학자 플라톤은 어떤 행사에서든 그녀에게 맨 처음 제물을 바쳤던 이유를 그녀의 이름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헤스티아라는 이름은 ‘참 존재’라는 뜻의 ‘우시아(οὐσία)’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참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에게 먼저 제물이 바쳐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참 존재’란 무엇일까? 혹시 그녀가 진실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존재라는 의미는 아닐까?

 

분쟁과 다툼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들


헤스티아는 참다운 존재답게 분쟁과 다툼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녀는 제우스가 티탄신족과 싸울 때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채 멀리 비켜나 있었다. 그녀의 행보는 마치 화로의 불길처럼 조용하고 은은할 뿐. 그래서 헤스티아는 신전이나 신상이 없는 여신으로 유명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화로를 그녀의 신전으로, 불길을 그녀의 신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집안 중앙이나 모든 공공기관의 중앙에 화로가 있어 늘 그녀를 마주하는데, 굳이 신전이나 신상을 세울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처럼 ‘얼굴 없는 여신’으로 알려진 헤스티아는 로마시대 베스타 여신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비로소 약간의 조각상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 여신상에도 헤스티아 여신의 조용하고 그윽한 성품은 잘 드러난다. 베스타 여신상은 옷을 다 입은 채 진지한 얼굴로 조용히 앉아있거나, 머리에 깊숙하게 베일을 쓰고 있다.

 

헤스티아에 관한 신화는 구체적인 서사가 없다. 그녀는 조용하고 은은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에 관한 에피소드가 없다. 그녀는 가끔 올림포스의 12주신 목록에서 빠지기도 하지만 그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도 없다. 가령 아테네 아고라에 있는 12주신의 제단에는 그녀의 이름이 들어있다. 하지만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프리즈에는 그녀 대신 디오니소스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헤스티아가 12주신의 목록에서 빠진 이유를 헤스티아의 수동적이고 갈등을 싫어하는 성격을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그녀는 디오니소스가 신이 되어 올림포스로 올라오자 올림포스의 평화를 위해 그에게 12주신의 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헤스티아는 화로와 함께 헤라처럼 집안일을 관장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두 여신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집을 축복해줄 것을 기원했다. 그래서 『호메로스의 송가』 중에는 두 여신에게 바친 노래가 있다. 하지만 가정의 신으로서 두 여신이 맡은 역할은 사뭇 달랐다. 헤라가 결혼이나 남편 그리고 자식과의 관계 등 추상적인 가정의 일을 담당했다면, 헤스티아는 청소나 설거지 등 구체적인 집안일을 담당했다.

 

그리스 신화의 3대 ‘처녀 신’ 중 하나

베스타신전의 여사제상


새로운 베스타 여사제의 헌정


그리스 신화에서 헤스티아는 아테나와 아르테미스처럼 처녀신이다. 남신이나 인간 남자들과 사랑을 한 적이 없다. 물론 남신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포세이돈과 아폴론이 그녀에게 구애하자 그녀는 제우스의 머리에 대고 처녀성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그러자 제우스가 그녀의 맹세를 인정하고 가정에서 가장 명예로운 장소인 화로를 관장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헤스티아가 자신의 처녀성을 지키려고 했던 일화는 또 있다. 로마시대의 신화학자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제우스의 형제자매들의 어머니였던 레아(Rhea)가 신들을 초대한 날, 조용한 곳에 혼자 곤히 잠들어 있던 그녀를 디오니소스의 아들 프리아포스(Priapos)가 겁탈하려 했다. 마침 디오니소스의 스승 실레노스(Silenos)가 타고 온 당나귀가 그 모습을 보고 울음소리로 다급하게 베스타를 깨웠다. 깜짝 놀라 깨어난 베스타가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를 듣고 신들이 몰려오자 당황한 프리아포스는 당나귀를 죽이고 도주했다.

 

 

헤스티아 유형의 여자, 그녀의 사랑법

화로가에 앉아 있는 베스타 신전의 사자


헤스티아 유형의 여성은 사람으로 치면 물안개처럼 고요하고 은은하다. 소리를 내거나 내색을 하지 않는다.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말도 헤프게 하지 않는다. 가끔 건네는 말에도 가을국화처럼 짙은 사랑의 향내가 묻어난다. 그녀는 한 번 마음을 주면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녀는 물 같고 공기 같다. 남자는 기복이 없고 잔잔한 그녀의 진수를 인식하지 못하고 식상해하며 쉽게 그녀를 떠날 수 있다. 그래도 그녀는 그것을 남자보다는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아울러 이별의 아픔이 아무리 크더라도 강한 영성의 힘으로 그 아픔을 스스로 꿋꿋하게 극복해낸다.

 

헤스티아 유형의 여자는 자매들이나 친구들과 반목이나 갈등에 빠지지 않는다. 사랑의 열정이나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그녀는 아르테미스 유형의 여자처럼 추진력도 없고, 아테나 유형의 여자처럼 경쟁심도 없다. 헤라 유형의 여자처럼 질투심도 없고, 데메테르 유형의 여자처럼 자식에 대한 욕심도 없다. 아프로디테 유형의 여자처럼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도 없다.

 

하지만 헤스티아 유형의 여자는 소외감이나 열등감을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그녀를 좋아한다면 바로 그녀의 한결같고 조용한 성격 때문이다. 헤스티아 유형의 여자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인물은 미국 작가 올컷(Louisa May Alcott)의 소설 『작은 아씨들』에 등장하는 네 자매 중 셋째 베스(Beth)이다.

 

두 명의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


헤스티아 유형의 여자가 결혼을 한다면? 집안 살림도 규모 있게 잘 하고, 남편과 경쟁하려 하지도 않으며,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지도 않는다. 그녀는 헤라유형의 여자처럼 남편에게 정절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자신은 정절을 지킨다. 그녀는 아이들에게도 큰 욕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펼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전통적인 현모양처에 딱 어울리는 유형이다. 그래서 자기 욕구나 주장이 강하지 않은 유순한 여자를 아내로 맞으려는 남자는 헤스티아 유형의 여자에게 강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진 시노다 볼린은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이란 책에서 그리스 신화의 세 처녀신의 유형을 집안일과 연관 지어 비교 설명하고 있는데, 아주 흥미롭다. 그녀에 의하면 아테나 유형의 여자는 집안일을 모두 하고 나면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아르테미스 유형의 여자는 이제 귀찮은 일을 끝내고 마침내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기뻐한다. 이에 비해 헤스티아 유형의 여자는 집안일을 그냥 즐겁게 한다. 집안일을 하면서 초조하게 시계를 보지도 않는다. 집안일도 일종의 마음 수련이나 종교적 수양으로 여기면서 여유를 갖고 할 만한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헤스티아 유형의 여자는 어떤 일을 맡겨도 싫은 내색 없이 묵묵히 해낸다. 토론을 할 때도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펴지 않는다. 그래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의 기분을 맞추어 주려하다가 그 압박감을 못 이겨 결국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다. 그래서 헤스티아 유형의 여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밝히는 법을 배워야한다. 싫으면 분명하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얼굴을 당당하게 보이고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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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file

    연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연세대에서 ‘릴케의 <말테의 수기>와 대도시 문제’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화, 세상에 답하다』, 『신화, 인간을 말하다』, 『신들의 전쟁』이 있다. 현재 여러 대학과 기업체, 지역 도서관, 병원 등에서 신화를 소재로 인문학 특강을 하고 있다.
댓글
  • 글도 항상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요번 칼럼에는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들 이라는 그림이 아주 볼만하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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