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얼마나 ‘더럽게’ 해봤어?
트위터에서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팔로잉하는데, 트레이시 에민의 <마이 베드 (My Bed)>를 테이트 리버풀에서 다시 전시한다는 트윗을 받았다. 아깝다. 작년에 런던으로 이사 간 친구를 만나러 영국에 갔는데, 1년만 늦게 갔어도 마이 베드의 오리지널을 봤을 텐데 말이다. 몇 년 전 작가가 이 작품을 설치하는 것을 유튜브로 보았다. 콘돔, 피가 묻은 속옷, 체액으로 뒤덮인 흐트러진 침구가 주요 소재다. 작가는 관계의 실패로 우울증에 시달리며 며칠을 침대에서만 보내다가 이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섹스의 뒤처리를 하지 않아 지저분한 침대를 고스란히 갤러리로 옮겨 예술로 승화하는 시대다.
언젠가 한 지인이 뉴욕의 현대미술관 모마 (MOMA)에 다녀온 뒤 “머릿속에 남은 건 빗자루뿐이다!”라고 했지. ‘네오다다이즘’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라는 ‘빗자루’ 설명서를 5분간 보다가 그 설명서를 휴지통에 버리고 왔다는 친절한 덧붙임도 함께. 빗자루를 그 비싼 맨해튼 땅에 걸어놓은 미술관의 패기도 대단하지만 단지 빗자루일 뿐인데 그걸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놀라웠다나. 미술관 빗자루 앞에서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을 떠올렸다는 지인이 <마이 베드>를 보고 뭐라고 감상평을 할지...그 사람의 표정이 벌써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진다.
내친김에 <마이 베드> 다큐멘터리를 유튜브 영상으로 다시 찾아보는데, 문득 나는 어디까지 ‘더럽게’ 섹스를 해 보았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생리 중에 섹스한 것?
얼굴에 정액이 튀었는데 무시하고 계속 페니스를 애무한 것?
제대로 성기를 닦지 않고 오럴 섹스를 허용한 것?
화장실에 갈 때마다 항상 물티슈를 챙겨가는 친구가 있다. 용변을 본 뒤 휴지로 한 번, 또 물티슈로 한 번 더 마무리를 해야 마음이 편하다고, 그 아이는 그랬다. 의외의 장소에서, 미처 준비도 하지 못하고 오럴 섹스를 받았을 때, 우습게도 이 친구의 얼굴이 섹스 도중에 떠올랐다. 좋은 습관은 미리미리 따라 하는 건데 말이다. 남자친구가 있으면서 어쩜 그리 긴장이 풀려 있었을까. 한동안 자괴감에 빠져 끈 팬티도 멀리하고 팬티라이너를 강박적으로 차고 다녔다.
하지만 더티 섹스라는 게 꼭 이런 일차원적인 의미만을 내포하는 건 아니다. 영화감독 우디 앨런은 영화만큼이나 인상 깊은 말도 많이 남겼는데, 다음은 그가 생각하는, 섹스와 ‘더러움’의 관계다:
sex is only dirty if it’s done right / 섹스는 제대로 했을 때만 ‘더럽다’
온몸을 불사른 열정과 격정적인 피스톤 운동이 휩쓴 침실은, ‘더티한’ 풍만함이 넘친다. 더러운 것과 불편한 것은 확실히 다르다. 내게 가장 불편한 섹스는 피임 장치가 없는, 안전하지 못한 섹스다.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철썩 내리치는 건 괜찮지만 장난이라도 섹스 중에 팔목을 세게 비트는 건 마음이 불편하고, 거슬린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정해진 곳 말고 ‘다른’ 곳을 파고드는 건, 상상만으로도 불편하고 ‘더러운’ 행위일 수도 있다.
“왜 싫은데?”
“그냥 싫어. 애널 섹스가 불편하다는데 꼭 이유가 필요해?”
애널 버진에 관심이 없다니 말도 안 돼!라고 꼬시고, 내 엉덩이를 사랑하지 않는 너는 비극이야 라고 윽박질러도 남자친구는 요지부동이었다. 사실은, 엉덩이에 얼굴을 파묻기 싫은 거다.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자신의 거시기에 내 엉덩이 냄새를 묻히고 싶지 않은 것. 질이나 항문이나. 50보 100보 아닌가?
“꼭 그렇게 이상하게 해야 해? 우리 좀 깔끔하게 즐기자.”
자기와 남의 체액이 섞일 수밖에 없는 섹스라는 행위에 깔끔이라는 단어를 끌어 쓰는 남자의 말이 내겐 괴이하게 들린다. 여하튼 남자친구에게는 이상한 감각인 것이다. 애널 섹스는.
누구에게는 엉덩이를 조금 더 다채롭게 쓰는 게, 신선한 즐거움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글/윤수은(섹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