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속궁합을 미리 알았더라면….
몇 해 전이다. 성격 차이로 이별을 발표한 유명 연예인 커플의 기사를 보던 엄마가 “속궁합이 별론가 보네.” 하고 무심하게 신문을 넘긴다.
-사실은 돈 문제로 헤어진 거라던데?
-잠자리가 안 좋았던 거야.
-기사에 또, 가치관이 맞지 않다고 나와 있어요.
-옷 벗기 전에 실컷 인생 이야기 했을 텐데 무슨 헛소리야.
어떤 식으로 꿰어도 결론은, 속궁합 때문이란다. 엄마의 표현대로라면 속궁합은 커플이 나누는 성배와 같은 위치다. 속궁합이 뭐기에?
속궁합이란 단어를 들으면 맨 처음 떠오르는 느낌은 좋으면, 죽겠다! 이다. 죽을 만큼 파트너와 몸을 겹치는 게 좋으려면 어떤 것이 먼저일까?
우선 자신과 파트너의 성적인 욕구가 딱 맞아 떨어져야 한다. 상대방의 몸이 훌륭하다고 해서 속궁합이 반드시 좋으리란 보장은 없다. 내가 만난 남자들 중에 키도, 페니스도 가장 큰 남자와의 속궁합을 되짚어 봐도 그렇다. 그 남자의 육체적 조건을 생각하면 나는 매번 섹스할 때마다 다 녹아내린 젤리 같아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다. 보기 드물게 거대한 그의 페니스는 분명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그게 전부였다. 자기 몸을 지나치게 과신해서 섹스에 성의가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그 남자와는 뭔가 ‘배부른’ 느낌의 섹스를 한 기억이 없다.
속궁합은 서로의 욕구를 맞추는 것이니만큼 그 기준이 애매하다. 특히나 오랜 교제를 고려하는 상대라면 더더욱.
섹스를 강제로 당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타인과 잠자리를 할 때는 어느 정도 취향이 추려진 상태다. 외모로 1차 취향이 걸러지고, 대화를 통해 2차 취향을 판단한다. 원 나이트 스탠드는 1차 취향에서 끝나기 때문에 애초에 속궁합이란 것을 따질 필요가 없고. 그렇게 걸러진 상대와 본격적으로 속궁합을 판단하는 첫 관문은, 키스다.
입술이 맞닿았을 뿐인데 몸에서 스파크가 인다면 얼마나 훌륭한 출발인가. 팬티를 벗지 않아도 이미 좋은 예감이 들 거다. 60%의 남녀가 첫 키스가 별로면 더 이상 관계를 지속시키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윌 스미스가 데이트 코치로 나오는 영화 <Mr. 히치: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를 보면, 여자 10명 중 8명이 첫 키스가 관계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리라 믿는다는 대사도 있다. 키스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키스를 통한 상대방의 ‘정보’를 토대로 사람들은 이미 궁합을 따진다.
무엇보다 속궁합은 자기 몸을 제대로 알기 전에는 파트너와의 섹스가 좋았네, 나빴네 하고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만지는 경험을 통해 좋은 느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자위를 통해 자신의 어디가 예민하고, 어떻게 만져야 즐거운지 파악이 되면 실전에서 파트너가 다소 헤매더라도 자신의 민감한 부위로 상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 때로는 몸을 만지는 것 말고도 메모를 하는 방식이 쓸모가 있을 수 있다.
일이 생기면 나는 그 문제를 종이에 적는 것으로 상황을 파악한다. 노트에 죽죽 글자를 써내려가다 보면 어느 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일종의 치료법(Therapy)이다.
지긋지긋한 여학교를 벗어나 드디어 남녀공학인 대학교에 입학할 즈음, 나는 바라는 남자친구의 이상형을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종이에 옮겨본 적이 있다. 잘 생기고, 피부가 하얗고, 키가 크고, 멍청하면 안 되고, 다정하고…, 쓰다 보니 어느 순간 포인트가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비밀 노트인데 내 속마음을 가감 없이 적자, 하고 노트에 잠자리 이상형을 썼다. 호기심이 가득한 소년의 눈동자를 지닌 남자의 거친 바다사람 같은 손가락이 내 클리토리스를 만져주면 좋겠다, 키스만으로 뿅 가게 하는 남자, 성기랑 가슴이랑 허벅지가 탄탄해서 깔렸을 때 마치 나무가 펄프로 으깨지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남자, 너무 시간을 끄는 건 별로!, 그리고 맨 마지막에 내가 좋아하는(이라 쓰고, 속뜻은 아주 잘 생긴) 남자랑 첫 경험을 하고 싶다, 라고 쓰고 마무리했다.
이 장난 같은 메모가 나중에 우연한 사고로 치를 뻔 했던 첫 경험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다른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데서 기쁨을 찾는 술 모임이었다. 술이 약한 내가 먹잇감이 되었고, 다정한 선배 역할에 충실한 남자가 나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전혀 관심 밖의 남자였지만 술김에 키스를 했다. 역시나, 속궁합 1차 관문인 키스가 별로. 그래도 그가 조금이라도 내 이상형에 가까웠으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섹스까지 이어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남자의 모든 게 미적지근해서 페팅 정도로 끝났다.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도 처음은 내 맘에 차는 남자랑 하고 싶다, 고 끼적인 이상형 메모가 떠올랐거든.
속궁합은 분명 연애를 이어줄 수도, 깨뜨릴 수도 있는 힘이 있다. 다른 도시에서 일하는 친구 집에 1박2일로 놀러갔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친구가 집에 없었다. 알고 보니 자다가 남자친구의 전화를 받고 그길로 그의 집에 갔던 것. 친구는 전날 밤까지 남자친구를 믿을 수 없다, 헤어질 거다, 라고 말해놓고는 그 말을 한 지 몇 시간이 채 안 되어서 잠자리를 하고 온 거다.
“하지만 그 남자랑 속궁합이 너무 좋단 말이야.”
그와의 섹스는 만족하지만 친구에게 집중하지 않고 다른 여자들을 기웃거리는 그의 성향과 ‘타협’을 해야 하는 상황이, 친구의 문제였다. 성욕은 비슷하지만 그 성욕을 즐겁게 이끌어줄 기반이 자꾸 흔들린 셈. 후회와 미련과 억울함이 가득한 친구 앞에서 무슨 말을 건네야 할 지 난감했다. 어찌되었든 그녀의 사생활이니까. 친구 커플은 이전에도 몇 번이나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한 역사가 있었는데, 결국 1년 후에 완전히 헤어졌다. 연애를 1년 더 연장한 것도, 또 새로운 사랑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1년이나 허비한 데에도 속궁합이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24시간 섹스만 하고 살 순 없기에 사랑을 이어가려면 속궁합 말고 다른 부분도 어울림이 좋아야한다. 섹스만이 관계의 전부는 아니니까.
아! 그리고 나랑 섹스 전 단계까지 간 선배와는 결국 아름다운 비밀을 가지지 못했다. 그 다음날 바로 주변인들에게 나랑 잤다고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를 한 모양이더라고. 같은 공간에 눕긴 했다. 정말 순수하게 각자 이불 덮고 잠만 자서 그렇지. 내가 그 선배의 ‘꼬추’라도 봤으면 분함이 지금껏 남아있진 않을 텐데.
그래서 뭐, So What?의 정신은 이런 일을 당하고 나면 빛을 발한다. 잠만 잤는데 어쩌라고?
니 말라빠진 손가락만 내 ‘아래쪽’에 몇 번 들어온 거, 그게 뭐, So What? 술을 조심해야지. 더불어 섹스에 있어서 입이 무거운 남자란 환상 속의 유니콘과 같은 존재란 걸, 뇌에 새기는 경험을 갖게 돼 감사할 따름이다.
글/윤수은 섹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