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면 창피해야 할, 그의 성감대
“스트레스가 없으면 창피하지 않아요?”
지인의 집들이에서 만난 정신과 의사 K. 그는 자신을 연어 회를 아직 포기하지 못한 페스코 베지테리언이라고 소개했다. 취미가 클래식 음악 감상이고, 시간이 나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는다나. 처음 만난 사람이라 날씨며 스포츠로 대화를 풀어가다가 요즘 스트레스가 없다고 했더니 대뜸 창피하지 않느냐고 그런다. 이래서 가끔은 자신과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있다. 스트레스와 창피함. 무척이나 ‘낡은’ 단어들인데도 어떤 상황에, 어떤 문장에 엮이느냐에 따라 느낌이 이렇게 다르다. 아이디어는 낡은 생각의 신선한 조합이라는 말이 가슴으로 와 닿은 순간.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염치 불구 다짜고짜 따졌다. 방금 말한 내용, 직업적으로 쓰는 말이냐, 농담이냐 아니면 어느 책에서 본거냐 하고 말이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그렇다고 얼굴을 들이미니 의사 분은 무척 당황하며 아니 그냥 농담입니다, 하고 싱겁게 마무리했다. 내 기억력은 절대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서 핸드백에 늘 가지고 다니는 작은 수첩을 꺼내들고 그분의 말을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 옆에 ‘침대에서 모르면 창피할 만한 것 생각하기!’라고 한 줄 더 썼다.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침대에서 몰라서 창피한 게 뭐가 있었지 하고 생각하니 바로 ‘남자의 성감대’가 떠오르더라. 남자의 성감대가 별거 있어? 성기가 성감대, 성감대가 성기지, 라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하고 살았다. 내가 남자의 요구에 응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전희 아닌가 하는 안드로메다 급 자뻑에, 펠라치오를 하는 걸 벼슬로 생각했더랬다. 명색이 섹스 칼럼니스트라면서. 창피한 과거다. 옷을 벗는 것으로 여자의 할 일은 끝이라는 생각을 접고 나서부터는 남자의 중심부에만 쏠려 있던 관심을 몸 전체로 돌렸다.
성기를 제외하고 시작부터 절정인 곳을 찾는 것은 사실 눈을 부릅뜨고 찾아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섹스도 몸을 쓰는 활동인 만큼 타고난 재능이란 게 있다. 하지만 성감대를 찾는 건 순수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열심히 찾기만 하면 발견한다. 여자의 몸도 그렇지만 남자의 몸도 굴곡이 있는 곳, 튀어나온 곳이 으레 성감대일 가능성이 높다. 얼굴 옆이라면 귀, 몸의 중앙은 젖꼭지, 하반신은 툭 불거져 나온 골반 주위나 착 올라붙은 엉덩이. 남자의 진심 어린 신음소리를 원한다면 손보다는 입을 쓰는 게 효과적이다. 말은 쉬운데 행동으로 옮기려면 약간의 제약이 있을 수도 있다. 가끔은 먹히지 않으려는(?) 방어에 밀릴 수도 있다.
“아, 제발 보지 마.”
여기다. 그의 엉덩이 중앙을 뚫어질 정도로 쳐다보고, 만지고 살짝 깨물어 버린다. 손보다는 입술로 반응을 알아보는 게 확실하다. 입술로 성감대를 찾으면 부르르 떠는 게 내 몸으로 그대로 느껴진다. 내 입술을 그의 엉덩이 주변에 묻으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그이는 쾌감을 느끼면서도 힘으로 나를 제압하거나 자세를 바꾸어버렸다. 분명히 여기가 핫 스폿이 맞는 것 같은데, 숫총각도 아니면서 왜 이럴까.
귀나 유두를 핥으려고 얼굴을 가져다 대면 몸에 힘을 빼고 기대하는 게 느껴지는데, 엉덩이 쪽은 쉽게 내주지 않았다. 너무 강한 자극 때문인지 아니면 수치스럽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무튼 한동안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내가 하도 엉덩이를 노려대니 좋아하는 69 포지션도 삼가는 모습.
그래서 방법을 바꾸었다. 섹스가 끝나고 그가 씻고 돌아와 잠을 청하려 할 때를 노렸다. 나는 못내 아쉬운 듯 얼굴에서 가슴, 배꼽까지 손과 입술로 쓸면서 내려온다. ‘자고 싶어’라는 눈치가 보여도 꿋꿋이 애무를 한다. 방금 전까지 힘차게 운동한 페니스는 살짝만 건드리고 최종 목표인 엉덩이로 돌진. 바로 엉덩이로 얼굴을 들이미는 것보다 남자의 앞쪽과 뒤쪽의 중간 지점, 회음부를 손가락 몇 개로 버튼을 누르듯 몇 번 눌러주며 예고제를 하는 것도 좋다. 뒷다리가 꿈틀 하는 게 느껴진다. 내 남자는 “언니 어릴 적에는 안 그러더니 변태가 다 되었네”하며 졸린 목소리로 나를 책망하듯 놀린다. 그 말에 잠깐 남자의 성감대를 귀신처럼 짚어내고 주무르는 어린 나를 상상하다가 가슴이 설레었다. 그랬다면 약관에 이미 섹스의 여신으로 등극했겠지.
엉덩이에서 페니스 쪽으로, 입술로 길을 만든다. 여유가 있으면 중간에 고환을 알사탕을 먹듯 입 안에서 한 번 굴리자. 이쯤 되면 남자의 온몸이 반응한다. 열심히 그의 하반신 아래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데 갑자기 어깨가 들려진다. 이리 와. 미션 컴플릿.
평소 당기지 않던 음식이 갑자기 끌릴 때가 있다. 견과류라든지 튀긴 과자 같은 것들. 찬장을 열어보니 마침 먹을 만한 게 보인다. 요즘은 포장지에 첨가되지 않은 내용물을 눈에 딱 띄게 표기하는 게 유행인 가 보다. 마카다미아 너츠 봉지에는 ‘콜레스테롤 프리’가, 쌀과자 봉지에는 글루텐 프리라는 문구가 과자 이름만큼 크게 새겨져 있다. 아주 중요한 정보라서 놓치면 안 될 정성 어린 조언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커피를 좋아해서 내 남자도 내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뭔가 커피에 관한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꼭 공유하려 든다.
“커피 향기가 집중력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된대”
“말하지 말고 그냥 한 잔 더 사 마시고 일해”
내 남자는 감성이 메마른 숫자형 인간이라 ‘조사 결과에 따르면’으로 시작하는 기사가 아니면 귀담아듣지 않는다. ‘엉덩이를 핥으면 수명이 늘어난다’와 같은 실험 결과가 첨부된 기사가 뜨지 않는 한 내 남자는 오늘 밤에도 자신의 엉덩이를 나의 애무로부터 사수하려 들 것이다.